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스티나 경당 (문단 편집) == 역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shafe.co.uk/sistine_chapel_reconstruction_1480.jpg|width=100%]]}}} || || 식스토 4세 때 재건축된 모습. [br]천장에 천장화가 아니라 [[별]]이 그려져 있다. || 지금의 시스티나 경당 자리에는 14세기 중반부터 마조레 경당(Cappella Maggiore)이 있어 [[교황청]]의 각종 [[미사]]와 의전이 행해졌지만 1세기가량 지나자 건물이 노후화되었고, 이에 따라 교황 식스토 4세는 마조레 경당을 헐고 새 경당을 짓기로 결정했다. [[피렌체]] 출신의 바치오 폰델리가 설계하고 조반니노 데 돌치의 감독으로 진행된 공사는, 1473년에 시작되어 1483년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에 축성되었다. 신축된 경당은 건축을 의뢰한 교황 식스토 4세의 교황명에 따라 시스티나 경당(Cappella Sistina)으로 명명되었다. 시스티나 경당의 외부는 장식적인 요소가 거의 없고 창문도 적으며, 경당에서 바깥으로 직접 나갈 수 있는 출입구 없이 [[사도 궁전|교황 궁전]]을 통해서만 출입할 수 있기 때문에, 외부의 접근을 차단하는데 용이해 [[콘클라베]]를 여는 장소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경당의 평면은 길이 40.23m, 너비 13.41m인데 이것은 구약성서에 언급된 [[솔로몬]]의 [[예루살렘 성전]]의 치수를 그대로 본뜬 것으로, [[바티칸]]이 [[예루살렘]]을 대신하는 새로운 성전으로 자리매김했음을 의미했다. 이외에도 바닥의 중앙부를 가르는 대리석 칸막이를 통해 경당을 두 구획으로 나누어 각각 교황 일행과 일반 신자를 위한 자리로 삼았는데, 이것 또한 솔로몬의 성전을 재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교황 일행의 수가 늘어나면서 이들이 사용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칸막이를 옮기는 바람에 지금은 한쪽에 치우친 상태다. 경당의 높이는 20.7m이고, 내부의 천장은 아치형이며, 그 밑에 있는 남쪽과 북쪽 벽면에는 각각 6개의 창문이, 동쪽과 서쪽 벽면에는 각각 2개의 창문이 있다. 이 중 서쪽 벽면의 창문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최후의 심판을 그리면서 폐쇄했다. 1564년 최후의 심판은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으로 인해 나체와 성기를 가리는 옷이 덧그려졌다. 이 작업을 맡았던 화가 다니엘레 다 볼테는 일 브라게토네(Il Braghettone), 즉 ‘기저귀 화가’라는 굴욕적인 별명을 얻어 오늘날까지도 회자된다. 1549년 화가 마르첼로 베누스티가 덧칠 이전의 모습을 그린 최후의 심판 모사품이 [[이탈리아]] [[나폴리]] 카포디몬테 국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현전하는 시스티나 경당의 최후의 심판이 얼마나 수정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https://www.bm-lyon.fr/expo/11/michel-ange/images/parcours/Fabre.jpg|마르첼로 베누스티가 그린 최후의 심판 모사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